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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국땅 한국, 어느 지하 공사 현장에서 사늘한 주검이 된 낙은 왜 죽은 것일까? 그것은 한국의 건설 현장이 보여주는 작은 안일함에서 나타난 결과이다. 작업반장이었던 한국 아저씨는 평소에도 아주 친절하고 따뜻하게 챙겨주는 분이었기에 언제나 낙은 고마워하였다. 작업은 낙과 또 다른 캄보디아 근로자와 굴삭기기사, 그리고 작업반장이 함께 작업을 한다. 캄보디아 인부 2명이 굴삭기가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철근이 나올 때 마다 찾아 제거해주는 작업을 하고 작업반장은 어두운 현장을 지켜보는 일을 하였다. 그러나 사건 당일 낙과 함께 일을 하는 캄보디아 외국인 근로자는 사정상 출근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작업은 이루어졌으며 사건 시간에 작업을 지켜보아야 하는 반장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사고를 예감할 수는 없지만 사고를 예견할 수 있는 충분한 상황이었다. 어두운 지하의 작업장을 시끄러운 굴삭기 한대와 초보인부 한명이 감당 한다는 것은 위험이 동반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생각이 든다. 외국인 근로자만의 어려움이 아닌 건설현장의 모든 노동자의 어려움이며 안일하게 현장을 관리하여 위험이 키워진 사고다. 사고 후 어느 누구도 낙의 싸늘한 시체 앞에 찾아와 울어 주는 사람 한 명 없었다. 사과 한마디 없이 보상처리에 대한 논의가 먼저 나오며 업체의 법무법인 대리인이 캄보디아 대사관과 협의 할 거라고 걱정 말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가? 사고 다음날 보상에 대한 업무처리가 죽음 앞에 위로가 되는 것일까?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없다고 생각해버린 업체관계자의 행동에 할 말을 잃었다. 사고는 굴삭기 기사와 현장 반장의 부재에서 난 사고라는 결론을 내리고 현장반장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말투가 거슬렸다. 책임을 따지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책임에 앞서 죽음이라는 그 단어의 무게를 마음으로 함께 통감할 수 없다는 것에 가슴이 먹먹했다. 한국인 노동자가 아닌 외국인 노동자이기에 받는 차별이 아니었다. 죽음 앞에 미안함과 아픔을 느끼기 이전에 사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따지는 것이 화가 났다.
그저 아픔을 함께 마음으로 나누는 것이 순서이고 그것만으로도 마음의 큰 위로가 된다는 사실을, 나 또한 아픔의 시간 뒤에 알았다는 것이 부끄럽다. "한국인 인부들이었다면 위험이 예견되는 작업장에 혼자 들여보냈을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한국인과 외국인이 다를 수 있다는 질문의 시작점에서 차별이 존재 할 수 밖에 없는 사회를 말해준다. 누구든 위험한 작업장에 사고를 예견할 수 있는 곳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사고 현장의 죽음 앞에 혹여나 생길지 모르는 책임이 자신에게 올까싶어 선을 그으며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의 행동이 어디선가 본 듯하다. 세월호가 침몰 되던 그날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 날, 책임을 운운하고 뉴스는 희생자 가족 앞에서 보상을 언급하며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러한 장면은 세월호 사고의 그날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러 희생이 있는 사고 현장에서 많이 나타나는 장면이라는 것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눈물을 흘리는 그 마음이 먼저 있었더라면, 아픔 속에 내던져지는 마음이 주는 불의와 내면의 고발은 무고가 아닐까. 나는 공감하지 않는 것이 악의적이고 공감하는 일은 선량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월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어도 공감은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아픔에만 반응하는 삶이 아닌 타자의 아픔과 어려움, 억압, 고난에 함께하는 마음이 아름다움이고 정의로움이다. 그 삶을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동참하는 자들을 초대하기위해 난 오늘도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낯선 골목으로 나간다.
“어디서 오셨어요? 우리 함께 아파하고 함께 웃어요..”
글쓴이 : 권주은(구미국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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